늘 궁금했었다. 누가 물어 봐도 자신 있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표지석의 문구만으로는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 대학신문을 들추어보니 ‘제막 앞둔 용봉탑’(전남대학보, 1978. 5. 18. 발행)이란 기사가 반갑기만 하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나름대로 상징적인 탑을 가지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초·중·고등학교에도 상징탑이 있다. 상징탑(용봉탑)은 제2대 호국단시절인 1976년 11월 9일에 당시 사단장이하 호국단 간부들이 민준식 총장에게 상징탑의 건립을 건의해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의 의견조사 설문지에는 ‘개교 24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본교에는 용봉인들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상징물이 없어 용봉인들의 기상을 고취시키고 학풍을 조성하는데 아쉬운 바가 적지 않았다. 이에 자부심을 갖도록 하고 기상을 고취하기 위해 용봉인상 건립을 강력히 추진코자 한다.’ 는 그 당시 취지가 기술되었다. 건립기금은 모금으로 충당했다. 제작비용은 3천1백39만원이다. 건립 장소는 본부 앞, 도서관 앞 분수대, 강당 앞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학생들의 50%는 도서관 앞 분수대에 세워지길 지지했으나 그렇게 할 경우 탑의 규모가 커야하고 분수대 공사까지 병행해야 해서 예산의 제약도 뒤따른다는 난점 때문에 지금의 장소인 당시 대학본부 앞 회전교차로로 결정했다.

용봉탑은 건립추진 3년째인 1978년 5월말에 준공하여 6월 8일 정오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높이 13.66m, 반경 4.45m의 크기이다. 화강암으로 된 좌대 3개가 교시인 진리·창조·봉사의 의미를 반영하여 안정감 있게 청동부분을 떠받쳤다. 그 위 청동부분은 웅장한 젊은이들의 힘찬 기상과 건장한 체력을 뜻한다. 정상부의 스테인리스로 제작된 모빌부분은 웅장한 뜻을 갖고 창공을 비상하는 봉황을 상징한다.

지춘상 교수가 남긴 구술자료(용봉탑의 건립 뒷이야기, 『전남대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설계는 홍익대 최기원 교수가 맡았다. 처음의 설계 의도는 용트림하며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그 안에 담아내려했으나 대학 측에서 정상부에 봉황을 추가로 요구해서 조화롭지 못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내키지 않았지만, 수정해 줄 수밖에 없었던 조각가 최기원 교수(홍익대)는 “이 작품은 내 작품이 아닙니다.”라 말하며 몹시 속상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아직까지 상징탑의 표지석 제작을 위한 문안 작성을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원회에서 논의해서 상징문·모금경위·조각가 등을 원문에 써넣기로 하고 문안 조정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간단한 상징문 표지석만 세우고 말았다. 다만 조각가의 부정적인 의견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용봉탑 꼭대기의 모빌 봉황은 풍향계처럼 강한 바람에만 조금씩 움직이는데 그러한 현상을 보고 학생들 사이에서 재미난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진다. 늦은 자정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연인이 용봉탑에 올라가면 봉황이 진짜 새가 되어 날아간다거나 혹은 사랑하는 커플이 자정에 용봉탑 밑에 있으면 봉황새가 내려와 두 사람을 감싸 안아주면서 둘 사랑이 영원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새내기 캠퍼스정보>로 까지 소개되었다. 급기야는 매년 3월경에 용봉탑의 정상부의 봉황 부리가 가리키는 단과대학이 그 해 취업률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취업이 어려운 시대와 낭만이 사라진 대학가에서 유포되는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 사회상까지도 반영하는 구전설화의 원형질이 잘 담긴 대학구술사 자료이다.  
▲ 황호균(역사연구회 대표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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