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찾는 모든 책이 여기에

(장신영, 자율전공 11)


가끔 그런 때가 있습니다. 어딘가가 아픈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며 감당 못할 문제가 눈앞에 닥친 것도 아닌데 어쩐지 한없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그런 날들 말입니다. 그런 날이면 그간 못 보고 지나쳐왔던 혹은 애써 못 본 척하며 지나 온 성가신 일들, 몸 속 어딘가로 날아가 상처를 내는 날카로운 말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외로움과 불안감 같은 것들이 약해진 마음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옵니다. 이런 날들이 지속되면 저는 대체로 망상의 세계로 도피하거나 평소보다 더욱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버리고는 합니다. 아주 사소한 우연이나 약간의 이질감에도 떠오르는 ‘혹시’라는 생각을 촉매 삼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그러다가는 다시금 사소한 것으로 하여금 현실로 되돌아와 현실이란 상상에 비해 얼마나 재미없고 우울한 것인지를 되새김질 하고나서는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냉소를 보내는 일을 일삼습니다.
요 며칠은 저에게 그런 일들을 일삼게 만드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그런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고 어쩐지 오늘도 그런 날들의 연속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건 거리 위를 걷는 모든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한여름의 태양빛이 오늘은 조금 약해졌다는 점입니다. 가을의 청명한 하늘도 봄의 따사로움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은 건 바람 따라 흔들리며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 나뭇잎의 그늘과 그 아래를 지나는 한여름의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그늘과 그늘 사이를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호숫가 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와 바람 따라 하늘거리며 그늘 장막을 치는 호숫가의 수양버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취직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를 올 때, 주위의 반대를 무릎 쓰고 직장과는 1시간이 넘는 거리의 지금 집을 고른 것은 오롯이 이 호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첫 직장에 대한 설렘, 드라마에서만 보던 직장인의 로맨스를 직접 경험하게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데다가 사회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이라는 두려움까지 더해져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오죽하면 출근길의 지옥철마저도 하나의 로망이었겠습니까. 그 때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으레 사회인으로서의 자기계발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집 근처에는 조깅할만한 호수 정도는 있어줘야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려의 말을 전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아득바득 우기고 우겨서 지금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이죠.
망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몹시 불분명해진 정신 상태라는 걸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그 때 이 집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지금은…’이라는 후회를 필두로 과거의 후회되는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봅니다. 괜한 소리를 해서 주변 사람들과 서먹해졌던 일, 모두가 지금이 타이밍이라며 그녀에게 고백하라고 조언했지만 용기 없음으로 인하여 그녀를 놓치고 비탄에 잠겼었던 일. 어쩌면 과거의 저는 이리도 어리고 연약하고 용기 없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후회들을 되새겨 가며 정처 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어딘지 모를 곳에 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로 위를 바쁘게 달리던 차들과 스마트폰에 시선을 내리꽂은 채 걷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고 출근시간의 소란스러운 거리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습니다.
오전 9시 7분, 입사 9개월 차, 아홉 달 만에 처음으로 평일, 그것도 달력에 까만 날로 표기된 날의 오전 거리의 햇살을 받고 서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빠르게 방향을 돌린다면 차가 막혀서 늦었다느니 하는 변명이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들여다 본 게 8시 59분이었더라면 아마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회사 쪽으로 달려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봐야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그런데 어쩐지 9시가 넘어버린 이 시점에서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현실감각이 조금 마비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햇볕은 여느 여름날의 오전처럼 뜨겁고 매미들은 구애하느라 정신이 없으며 바람은 언제나 그래왔듯 나뭇잎을 흔들고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어느 여름날 오전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만큼은 조금 특별하게 그리고 어딘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모든 것들이 자취를 감춘 한적한 도로 위에 가만히 서서 그 묘한 기시감을 마음껏 음미해 봅니다. 수십 대의 컴퓨터와 전자기기들이 뿜어대는 열기와 찌든 담배냄새, 무의식적으로 들이키던 인스턴트 스틱커피,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들에 무뎌지고 둔해졌던 온 몸의 감각들이 하나하나 다시 깨어납니다. 이곳에 불어오는 바람은 오래된 일기장에서 나는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껏 숨을 들이쉬자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인 채 버스 창문 사이로 보았던 ‘게릴라 헌책방’의 플래카드가 떠오릅니다. 정처 없이 움직이던 구두의 앞코가 드디어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해 걸어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기분 좋게 걷다보니 책장과 책 더미들이 지붕도 없이 미로처럼 늘어선 공터에 도착합니다. 솔직히 말해 여기가 헌책방의 입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작은 입간판이 서 있는 걸로 봐서는 이쪽이 입구지 싶습니다. 낡고 조그만 입간판에는 ‘당신이 찾는 모든 책이 여기에’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어찌나 오래된 입간판인지 페인트로 쓰인 글씨 이곳저곳이 갈라져 약간 괴기스럽습니다.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책장과 책장들 사이로 걸음을 옮겨봅니다.
한 낮의 괴기스러움이라는 색다른 느낌을 조금은 즐기면서 책장과 책장 사이를 조심조심 돌아다녀 봅니다. 이곳에 책들을 가져다 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곳에는 말소리는커녕 인기척도 없이 적막만이 감돕니다. 어쩌면 수많은 판타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세계로 들어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들이 으레 그래왔듯 말입니다.
“잠깐 지나가도 되겠나?”
판타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망상에 빠져보려는 찰나 갑작스런 인기척에 흠칫 놀라 현실로 돌아옵니다.
“고맙네.”
놀란 나머지 멍하니 있는 제 눈앞으로 50대 초중반 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슥 지나갑니다. 정신 차리고 자세히 둘러보니 책장들 사이로 몇몇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역시나 여긴 지루하고 평범한 현실이었나 봅니다.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이 현실이 영화라 한들 제 배역은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걸 수차례 통감해왔으면서도 이런 순간에는 늘 씁쓸함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씁쓸함을 지워버리기 위해 드디어 책들 쪽으로 관심을 돌려봅니다.
그림이나 무늬라고는 없는 빛바랜 표지를 가진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있습니다. 책장이 부족했던 탓일까요. 수백 권은 되어 보이는 책들이 위태롭게 쌓여져 책무더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주 오래된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부분에 온 모양입니다. 마구잡이로 쌓인 책 더미 사이로 책 한권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조심스레 책 더미에서 꺼내보니 빛바래고 얼룩진 표지 한가운데에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글씨체로 제목만 덩그러니 쓰여 있습니다. 중학생 때쯤으로 기억합니다. 부모님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못 이겨 억지로 읽었던 세계문학전집, 그 어딘가 쯤에 끼어있던 책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었습니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가 되었습니다. 꺼 놓은 스마트폰엔 이미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메시지 그리고 스마트함의 상징인 SNS를 통한 연락들이 미친 듯이 날아들고 있을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무단결근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 고민은 관두고 책이나 읽을까 합니다.
몇 분 째 표지만 들여다보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첫 페이지를 넘깁니다. 순간 눈이 핑 돌더니 활자들이 눈앞에서 춤을 춥니다. 하나도 읽어지지를 않습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니 딱 보기에도 오래된 활자들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오른쪽에서부터 읽어나가는 방식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책을 사람이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읽기 시작한지 세 줄 만에 책을 덮습니다. 손님 없는 식당이 다 괜히 손님이 없는 게 아니듯 읽는 사람이 없는 책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습니다. 이 과도한 오래됨이 덜 한 곳으로 가야지 싶어 걸음을 옮기는 데 책무더기들 사이로 아까의 아저씨가 보입니다. 무얼 보고 계시는 건지 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게 만드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십니다. 어쩐지 그 분위기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무얼 보고 계신지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인기척을 숨기고 살금살금 다가가보니 20세기 스타일 미녀들의 벗은 몸이 매 페이지마다 한가득 실려 있는 잡지를 손에 쥐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TV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오래된 외설 잡지지 싶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아저씨의 손끝을 눈으로 좇으며 어깨너머로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멈춰섭니다. 어느새 아저씨의 눈이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아저씨는 멋쩍게 배시시 웃으십니다. 사춘기 소년 같은 그 웃음에 저도 덩달아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화답합니다. 그러고는 둘 사이에 흐르는 마치 영원과도 같은 침묵.
“자네는 이런 거 본 적 없겠지? 이런 거 볼 세대는 아닐 테니까 말이야. 허허”
난생 처음 보는 아저씨에게 듣기에는 조금 과격한 질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답을 안 하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에 답은 해야겠습니다.
“예, 뭐.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이건 백퍼센트 진실입니다.
“그렇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다 컴퓨터로 본다고 하더라고. 자네도 그렇게 보는 건가?”
“예, 뭐…”
이것도 백퍼센트.
“어렸을 때는 진짜 이거 한 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여기는 무슨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 허허.”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주변에 있던 책 더미는 책 모서리들이 다들 빨갛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대놓고 내어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애들이 보면 어쩌려고.
“거참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건데 말이야. 그 때는 이런 게 왜 그리 보고 싶었는지 몰라. 막상 힘들게 구해 봐야 몰래 보고 숨어서 보고 하느라고 뭐가 나온지도 모르고 제 풀에 놀라 덮어버리고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거든. 생난리 쳐가며 몰래몰래 다 보고 나봐야 남는 것도 없었는데.”
중년의 남자가 우수에 잠겨 추억을 더듬는 모습이라는 게 늘 멋있는 것만은 아니었나봅니다. 적어도 산더미처럼 쌓인 외설잡지들 사이에서만큼은 확실히 멋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냥 금지된 일을 몰래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해. 혼자 보는 것보다 이거 한 권에 대여섯 명씩 엉겨붙어서 시시덕거리는 게 진짜 재미였거든.”
목소리까지 추억에 잠겨드는 듯 목소리도 서서히 작아지더니 이내 혼자만의 속삭임으로 변합니다. 이쯤에서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저를 향해 이야기하고 계실 수도 있는 일이기에 선뜻 자리를 뜨기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중년아저씨의 외설잡지 독후감을 듣고 서 있는 것은 어깨너머로 몇 장 훔쳐본 것에 대한 벌이라기엔 조금 지나칩니다. 대체 이 아저씨는 이 시간에 출근도 안하고 왜 여기서 저런 걸 손에 쥐고 추억에 잠겨 있는 걸까요. 술만 들어가면 내가 왕년에 내가로 시작하는 영웅담을 반복하는 중년 백수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출근은 하고 온 거라네.”
아저씨는 손에 들고 있던 외설 잡지를 책 더미 위에 올려놓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십니다. 아무래도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게 저도 모르는 사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린 모양입니다.
“어… 출판사 쪽에서 일 하시나 봐요. 하하.”
적절한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넘겨볼까 합니다.
“아냐. 오늘 잘려가지고 말이야. 그렇다고 가족들은 전혀 모르는데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여기 와 있더라고. 뭐 흔한 사연이지.”
안 넘어가네요.
아까와는 조금 다른 각도로 다시 마주하게 된 아저씨의 얼굴엔 사춘기 소년 같은 멋쩍은 미소는 깊게 패인 주름들 사이로 사라지고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만이 새겨져 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오게 된 건데, 생각보다 너무 좋은 곳이더라고 학생 때 몰래보던 이 야한 잡지들하며 철없을 때 여자 한 번 꼬셔보겠다고 사들였던 기타 악보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 읽어주던 동화책까지... 내가 알던 책들이 다 여기 모여 있는 것 같아.”
아저씨는 가방 속에서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동화책 한 권을 꺼내 들고는 엷은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책들을 보면 행복했던 순간들이 다시금 떠올라. 예쁘기만 하던 아이들의 미소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장발에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들쳐 메고 함께 걷던 친구들.”
색이 바랜 셔츠소매, 그 끝에 늙은 소나무 줄기 같은 손이 튀어나와 있습니다. 아저씨는 그 손끝으로 동화책의 표지를 훑으며 다시금 추억 속으로 사라지십니다.
추억에 잠겨버린 아저씨를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그저께 밤,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가 떠오릅니다. 학창시절 밉기만 했던 선생님과 좋아하던 여학생, 유행했던 노래와 패션에 대한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수다를 떨다가 결국 ‘그 때가 좋았어, 그 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자조와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었습니다. 아마 저 아저씨도 그저께 밤의 저와 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내일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고 한 없이 두렵기만 한데 지난날들은 너무도 그립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 때의 상처들은 이미 아물어 괴로웠던 일들마저도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기에 아저씨와 그저께 밤 술자리에서의 저는 지나온 날들을 못내 그리워하고 아쉬워합니다.
어쩐지 갑작스레 감성적이 되어서는 옛 생각에 빠져버렸습니다. 멍한 상태로 걷다보니 아까와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해봐야 주변에는 책들뿐이지만요. 낡을 대로 낡아 책이라기보다는 종이뭉치에 가까운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던 아까와는 달리 앤틱함이 묻어나는 오래 된 가구들과 책들이 뿜어내는 묘한 향기, 높다란 책장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중세 귀족의 서재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지고 목뼈가 곧게 서며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중세의 귀족들은 이런 느낌을 즐기려고 서재를 만들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귀족이 된 망상을 즐기며 책 제목들을 눈으로 훑고 있는데 책장 위 몇 권의 책들이 제 쪽으로 슬금슬금 가까워집니다. 착각인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내 책장에서 탈출해버린 몇 권의 책들이 제 발등 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골반까지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에 귀족이고 뭐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연스럽게 몸이 주저앉습니다.
“어머,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소리의 8할쯤이 코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은 비음 섞인 여자 목소리가 고개 숙인 제 정수리 쪽에서 들려옵니다. 있는 대로 인상을 꾸긴 채 올려다보니 온갖 유행아이템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가 서 있습니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그 넘치는 세련됨이 주위에 늘어선 책장들의 앤틱함을 쥐어뜯는 기세로 반짝거립니다.
“어? 누구세요?”
그새 제 얼굴을 확인한 여자가 몹시 당황하며 제게 누구냐고 묻습니다. 황당한데다가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혹시, 이 근처에서 그쪽이랑 비슷한 옷 입고 있는 남자 한 명 못 봤어요?”
네, 제 발가락이 부서졌나 확인하느라 볼 새가 없었습니다. 이것 참 미안해서 어찌한답니까.
“저기, 진짜 죄송한데 같이 좀 찾아주시면 안 돼요?”
사람 다치게 해놓고 사과도 제대로 안하는 이런 무례한 사람을 제가 1시간 째 돕고 있습니다. 머리가 크기 시작한 중학생 때 이래로 학창시절 6년, 대학시절 4년, 군대 2년, 회사생활 9개월, 도합 12년하고도 9개월 동안 마주해 온 수많은 불의와 불합리, 부조리들을 오로지 마음속으로만 욕하고 따져가며 살아온 제가 어느 날 갑자기 패기 넘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나이 자존심에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싫다고도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찾았어요?”
“아니, 아무데도 없어요.”
“어딜 간 거야, 대체. 곧 비도 올 것 같은데.”
해가 쨍쨍한데 비는 무슨, 하는 생각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만치서 두꺼운 구름떼가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한바탕 제대로 쏟아낼 기세입니다.
“제가 몇 년 째 짝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어느새 책장용 발판에 걸터앉은 여자가 묻지도 않은 자기의 연애사를 풀기 시작합니다.
“몇 년 째 그 사람 주위에서 맴 돌기만 했었거든요. 이야기도 제대로 해본 적 없고 진짜 말 그대로 맴 돌기만 했었죠. 그 사람은 아마 제 이름도 모를걸요? 그래도 이름은 알려나”
“그것…”
“둘이 이야기 해볼 기회나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기회들이 있기는 했었는데 뭐랄까, 뭔가 너무 평범한 거 있죠? 뭔가 드라마틱함이나 낭만적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상황들 있잖아요. 알죠? 어떤 건지”
“뭐…”
“근데! 오늘 그 사람이 여기 온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거죠. 책, 그것도 아주 오래된 책. 그런 책들이 가득히 들어있는 책장과 책장들 사이. 우연히 마주치는 두 남녀, 비어있는 책장 사이로의 눈빛 교환과 우연히 같은 책으로 뻗은 손이 맞닿는 상황. 낭만과 드라마의 느낌이 팍팍 나지 않아요?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여기 와서 그 사람 근처만 계속 쫓아다녔는데. 그만 어이없는 실수로 놓쳐 버린 거죠.”
‘실수로’라는 부분에서 제 쪽으로 눈길을 준 걸로 봐선 제가 실수의 원인인 듯합니다.
“그럼 그 사람 때문에 여기 온 거네요. 책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그쵸! 낭만적이지 않아요?”
여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왠지 외설 잡지를 보며 추억에 잠겨있던 아저씨의 눈빛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낭만도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않아요?”
방금 내뱉은 말은 제가 생각해도 차디 찬 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어쩜 그리 사람이 냉소적이냐며 비판해도 반박의 여지라고는 없는 빼도 박도 못할 냉소 그 자체였습니다. 제 차디 찬 질문이 이 에너지 넘치는 여자를 상처 입힌 게 아닌지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네, 알아요.”
오히려 목소리가 한 층 더 밝아진 걸로 봐선 괜한 걱정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이 정도로 상처 입을만한 사람이 아닌 거 같긴 했습니다.
“낭만이라는 거, 언젠간 분명 현실이 될 거에요. 저도 잘 알죠. 근데 전 그래서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이 낭만이, 설렘이, 두근거림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게 이 낭만을 한 층 더 낭만적이고 소중하게 만들어 주잖아요.”
여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생기 있어졌습니다.
이 대책 없는 낭만주의는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나 반짝거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아, 벌써 1시간이나 지났네요. 이제부터는 혼자 찾아볼게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1시간 동안이나 못 찾은 걸로 봐선 집으로 돌아갔거나 했겠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해줄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 낭만주의 스토커는 계속 찾아다닐 테니까요.
여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절 가리킵니다.
“그나저나, 그 쪽은 딱 봐도 직장인인거 같은데 여긴 왜 온 거에요? 출판사 직원?”

오후 2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인데 이곳은 마치 초저녁처럼 어둡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만치에 있던 구름 떼가 어느새 머리 위를 뒤덮고는 으르렁거립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책 주인들은 천막으로 책들을 덮느라 분주합니다.
분위기로 봐선 당장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를 뜨지 않는다면 쫄딱 젖을 텐데 어쩐지 발이 떨어지질 않네요.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제가 여기를 왜 왔을까요. 평소라면 ‘뭐. 그냥 어쩌다보니.’ 정도의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넘어갔겠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습니다. 사랑이니 낭만이니 하는 걸 찾아서 평일 한 나절을 책장 사이로 뛰어다니는 스토커의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하긴 싫었을까요.
잘 생각해보니 헌책방에 왜 왔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도 같습니다. 아니, 잘 못 됐습니다. 헌책방에 책 사러 오지 왜 왔겠습니까. 헌책방에 사람이 있다. 그럼 으레 ‘책 사러 왔겠구나.’ 해야지 왜 왔냐고 묻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매너랍니까.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하릴없이 짝사랑에 눈 멀어 오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나봅니다. 아마 저도 뭔가 사고 싶은 책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잠시 잊었을 뿐이죠.
“저기, 저 책 좀 꺼내주실 수 있으세요?”
여기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는 게 취미인가 봅니다. 웬 학생이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옆에 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절 올려다보며 제 앞의 책장 맨 위 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딱 봐도 중학생, 좀 너그럽게 봐서 발육이 더딘 고등학생 정도로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평일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입장은 아닌 듯합니다.
“저기, 저 책 좀…”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나봅니다. 학생은 약간 주눅 든 표정으로 절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저도 덩달아 학생을 마주보고 섭니다.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될 입장이라는 공통점 탓일까요. 묘한 동질감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동시에 이런 일탈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저와 이 학생 말고도 이 곳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며 마음 한 켠에 걸려있던 죄책감 같은 것이 해소되는 짜릿함까지 느껴집니다. 아마 이 학생 역시 저처럼 답답한 일상을 견디다 못해 짧은 일탈을 행했을 겁니다. 어떤 사연일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물어볼까 합니다.
“넌 왜 여기 있니?”
아-주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기까지 한 질문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잘못된 질문이라며 비분강개하던 말을 아주 가감 없이 공격적으로 내뱉었습니다. 그냥 책 하나 집어달라고 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학생 입장에선 제가 뭘로 보일까요. 격한 후회가 밀려오지만 뱉은 말은 언제나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과 제스처를 유지함으로써 이런 곳에서는 으레 받을 수 있는 질문을 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어필해보려 합니다.
학생은 잠시 동안 뚱한 표정으로 절 올려다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습니다. 이 어리고 반짝거리는 미소는 아무래도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인가 봅니다.
“재밌으니까요.”
학생은 책장 선반을 딛고 올라 께끔발로 책을 꺼내 들고는 헤실거리며 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손에 든 책의 어딘가 쯤을 대충 펼쳐들고는 저를 향합니다.
“이거 보여요? 여기 이 얼룩. 이거 누군가의 눈물자국일지도 몰라요. 이 책의 이 부분이 너무 슬퍼서 울었을 수도 있고 이 책이 누군가에게 받은 이별 선물이라서 읽다보니 눈물이 났을 수도 있어요.”
그냥 라면국물이 튄 걸 수도 있겠지.
“뭐 그냥 얼룩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새겨져 있다는 게 너무 재밌지 않아요? 요즘은 소설들이 다 영화가 되고 사람들은 책보다 영화에 더 열광하는데 원작을 읽어 본 사람들은 늘 책이 더 재밌다고 하잖아요. 그게 왜 그렇다고 생각해요?”
유명교수의 강연을 멍하니 듣다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때의 느낌과 똑같습니다. 순간 어딘가 모자란 인간이 되어버린 듯 말 한 마디 못하고 있는데 학생은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상상할 수 있어서에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요. 적어도 저는 그렇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얼굴을 상상해보고 소설 속 배경을 머릿속으로 직접 그려보는 일이 너무너무 즐거운 걸요.”
이 학생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게 일탈 중이라는 공통점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 친구도 망상병 비슷한 것에 걸려있나 봅니다.
“그래서 학교도 안 가고 여길 온 거야?”
“학교는 그럴 시간을 주지를 않는걸요. 즐거운 생각, 행복한 상상에 빠지려고만 하면 별의별 방법으로 현실로 끌어내 버리기나 하죠. 게다가 학교 곳곳에 널려있는 문제집들은 기름이라도 잔뜩 집어먹었는지 너무 새하얘서 눈이 다 부셔요. 재미있는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학생은 일인극이라도 하는 듯이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새로운 표정을 보여줍니다. 늘 같은 표정인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사람의 얼굴이라는 게 이토록 다양한 표정을 지어낼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학생은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겠지만 인생 선배로써 조언 한 마디쯤은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학생이 학교를..’로 시작하는 고루한 연설을 이곳이 폐장할 때까지 쉬지 않고 해 줄까 하다가 딱히 저 스스로에게 떳떳한 입장은 아닌지라 관두기로 합니다. 학생은 잠시 생각에 잠긴 저를 빤히 보더니 한숨을 팍 뱉습니다. 이 나이의 학생이 뱉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깊은 한숨입니다.
“알아요. 학생은 학교를 가야하는 거고 지금 몇 년 고생하면 미래의 몇 십 년을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거, 목표를 가지고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거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기타 등등. 저도 다 들어서 알고 있고 그게 아주 거짓말은 아니란 것도 충분히 느끼고 있어요.”
당돌한 말투에서 이 아이가 귀에 못이 박히게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왔고 본인 나름대로 고민해 왔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근데 있죠. 전 재밌게 사는 게 꿈이자 삶의 목표거든요. 목표가 재밌게 사는 건데 나중에 재밌으려고 지금이 불행하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한 거 아니에요? 전 오늘도 재밌고 어제도 재밌고 내일도 재밌는 삶을 살 생각이거든요. 그러려면 일단 지금이 즐거워야 하는 거잖아요?”
학생의 말에 약간 홀린 느낌입니다. 이건 어쩐지 제 쪽이 훈계를 들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학생은 멍청하게 서 있는 저를 향해 한 번 씩 웃고는 한 마디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거에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책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책장들 틈으로 모습을 감춥니다. 학생이 사라진 책장 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뺨을 타고 물방울이 흐릅니다. 스스로가 얼마나 염세적이고 비관적이었는지를 깨닫고 흘리는 참회의 눈물인가해서 보니 그냥 빗방울입니다.
주변사람들에게 냉소적이라는 평을 받는 저에게 인생의 깨달음을 주려는 듯한 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그래! 인생은 아름다운 거였어, 내일을 향해 달리는 거야.’라며 석양을 향해 달려갈 제가 아닙니다. 10대 초반부터 염세주의와 냉소로 일관하며 남들에게는 스스로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세상을 보고 있는 거라고 주장해 온 사람으로 이 정도 우연의 연속에 눈이 초롱초롱 해지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뺨으로 흐르는 빗물을 닦아내고 보니 바닥에 빗방울 자국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꺼운 구름들이 제 정수리 위에 빗방울들을 쏟아냅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현실로 돌아가라며 끼얹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격정적인 소나기입니다. 손닿는 대로 낡은 책 하나를 집어 들고 대충 머리 위만 가린 채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달립니다. 찰박이는 빗물에 바짓단이 젖어들고 어깨와 등허리에는 땀과 빗물이 섞여 흐릅니다. 코와 입으로 날아드는 물방울들 때문에 호흡이 배는 가쁘지만 어쩐지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뛰는 것도, 쏟아지는 비를 맞는 것도 오랜만이기 때문일 겁니다.
입구 쪽에 다다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서 나가고 있습니다. 쫄딱 젖어 뛰는 사람들 사이로 아까의 낭만주의 스토커가 다른 남자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오늘 소나기가 올 것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짝사랑의 남자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을 것까지 예상하고 우산을 챙겨들고 왔었던 모양입니다.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 우연히 마주친 두 남녀, 함께 쓰는 우산. 낭만적이다 못해 낭만이 철철 넘쳐흐르는 상황이기는 합니다. 무서운 노력으로 만들어진 우연 아닌 우연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요. 뭐,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드라마틱한 전개가 이루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입구 쪽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심심한 축하의 말을 보내도록 합니다.
이런저런 축하의 말들을 마음속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이마에 축축하고 질퍽한 무언가가 들러붙은 게 느껴집니다. 살짝 겁먹은 손짓으로 더듬더듬 만져보니 머리 위를 가리고 있던 오래된 책이 쏟아 붓는 소나기를 견디지 못하고 넝마주이가 되어 이마와 머리카락 곳곳에 엉겨 붙어 있습니다. 낭만주의 스토커 씨의 결말을 감상하느라 생각보다 오랫동안 멍청히 서서 비를 맞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소나기를 맞는 것 정도야 상쾌한 기분으로 넘겨줄 수 있지만 호박죽을 뒤집어 쓴 듯한 이 기괴한 촉감은 달게 받아들이기 어렵지 싶습니다. 짜증 섞인 손짓으로 물 먹은 종이뭉치들을 떼어내 바닥으로 던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머리에 닿습니다.
“아이고 이게 뭐야. 넘어졌었나 봐? 괜찮아?”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외설잡지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비 오는데 아직도 안가고 뭐했어.”
아저씨의 도움으로 머리를 다 정리하고 나서야 아저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안 그래도 듬성듬성했던 머리칼이 비에 젖어 미역줄기마냥 머리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덕분에 휑한 머리가 더더욱 도드라집니다.
“예. 어쩌다 보니… 안 가고 있었다기보다는 못 갔다고 봐야죠.”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할까 하다가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둘 중 하나가 빗줄기에 익사하지 않을까 싶어 그만두기로 합니다.
“그나저나 아저씨는 좀 괜찮으세요?”
“어? 뭐라고?”
“회사 잘린 건 좀 괜찮으시냐고요!”
빗소리를 뚫어보고자 빽 소리를 치고 나서야 정신 나간 질문법을 구사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이 헌책방의 무언가가 말을 뱉기 전에 걸러주는 제 머릿속 어느 부분을 마비시켜버린 모양입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쏟아지는 빗소리가 너무 거센 탓인지, 아저씨의 달팽이관이 노후가 심각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설마 일부러 못 알아들으시는 척 하시는 건 아니겠죠.
“미안한데, 우리 딸내미가 우산을 안 가지고 가서 말이야. 내가 가져다 줘야 하거든 다음에 보자고.”
아저씨는 젖은 미역줄기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빗속으로 사라지십니다. 뛰어가시는 아저씨의 뒷모습으로 봐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일해 온 직장을 잃은 오늘이나 예상조차 못할 만큼 캄캄한 내일보다 지금 비를 맞고 있을지도 모르는 딸에 대한 걱정이 더 크시다는 건 추억 속으로의 일탈은 오늘로 마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테니까요. 물론 아주 가끔은 뒷주머니에 말아 넣은 빨간 잡지 한 권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실 수는 있겠지만요.
입구까지 숨 가쁘게 달려와 놓고서는 입구 앞에서 몇 분 동안을 멍청하게 서서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슬슬 몸속에서부터 으슬거림이 올라옵니다. 다행히 아플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던 소나기는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눈썹을 타고 폭포수처럼 흐르던 빗물이 멎은 덕분에 줄곧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이제야 제대로 뜰 수 있게 됐습니다. 주변이 제대로 보입니다. 아직 작은 물방울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는 있지만 짙게 깔렸던 구름들은 조금씩 걷혀 그 사이사이로 햇볕이 쏟아집니다. 책장을 덮은 천막 가장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한 방울씩 지면으로 떨어지고 떨어진 물방울들은 햇빛에 반짝거리는 작은 웅덩이를 이룹니다.
천막 아래에 기대어 비를 피하던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헌책방을 떠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걸음을 옮기는데 들어올 때 보았던 입간판의 뒷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찾던 책은 찾으셨나요?’
뻔한 상술. 빈손으로 떠나려는 고객의 발걸음을 한 번 멈춰 서게 만들 딱 좋은 멘트입니다. 아마도 감성적인 고객들은 이 말에 걸음을 돌려 책 한권이라도 집어 들게 될 것입니다. 감성을 간질이는 이런 멘트를 가벼운 비웃음으로 넘길 수 있게 된 걸로 봐선 차가운 빗물로 거하게 세수 한 덕에 현실감각이 좀 돌아왔나 봅니다. 돌아온 현실감각과 함께 내일에 대한 걱정과 우려도 되살아납니다. 내일 출근하면 오늘의 무단결근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합니다.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간 드라마 작가를 해보는 게 좋겠다며 절 강제 프리랜서로 만들어 줄게 뻔합니다.
바닥에 고인 물이 찰박거릴 만큼 부산스레 다리를 떨어가며 고심해보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뭉툭한 수라도 써야합니다. 헌책방에 왔었다는 걸 사실대로 시인하는 겁니다. 물론 약간의 거짓도 곁들여서요. 아주 당당하고 곧은 눈으로 ‘하루 밖에 하지 않는 게릴라 헌책방에서 꼭 찾아야만 할 책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새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하는 사태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구 쪽으로 향해있던 몸을 돌려 책장들이 만든 미로 쪽을 바라봅니다. 어느새 비는 완전히 그치고 구름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찾을 책은 이미 정해뒀습니다. 사실 학생과 헤어질 때쯤부터 해서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제목도 작가도 책의 표지며 내용까지 제대로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지만 눈앞에 보이기만 한다면 ‘이거다!’라고 외치며 집어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꼭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져서 일까요. 그 책에 대한 기억들이 조금씩 되살아납니다. 그 책을 읽은 건 한창 스스로의 조숙함에 취해있던 초등학생 때입니다. 주변 어른들과 친구들은 참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하다며 입을 모았고 저는 한 편으로는 겸손을 떨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스스로의 조숙함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평범하고 어린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저는 특별한 사람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남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했었죠. 그 시절의 저는 조숙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왠지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한창 학생들에게 독서를 강조하던 시기였는지라 학교 도처에 어디선가 굴러 들어온 손 때 묻은 책들이 가득했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조금 수준 있어 보인다 싶은 책을 골라 들고는 읽는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지금 찾고 있는 책도 그 과정 중에서 읽었던 소설로 제목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용은 흐릿하지만 조금씩 기억이 납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고 구두는 젖은 땅에 푹푹 박히지만 불쾌감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걸음은 더욱 가볍고 빨라지며 거침없어집니다. 가까스로 달리지만 않는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책장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10년도 더 된 그 예전에도 손때 가득 묻은 낡은 책이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억들이 더 새겨졌을지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차오르는 기대감이 저를 미소 짓게 만듭니다.
기대감에 가득 차 뛰듯이 걷고 있는데 낯익은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헌책 마니아 학생입니다. 투명한 우비를 뒤집어쓰고 책장들 사이에 기대서서 책 한 권을 읽고 있습니다.
“비 맞아가며 책 보고 있었던 거야?”
여기 온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네 봅니다.
“우와, 쫄딱 젖으셨네요. 우산도 없이 안 돌아가고 여기 있었던 거에요?”
“응, 꼭 찾아야 할 책이 생겨서 말이야. 회사에 변명이라도 하려면 한 권은 사가야 하지 않겠어?”
“정말 변명거리가 필요해서 찾는 거 맞아요?”
아까도 그렇고 이 학생은 사람 마음을 읽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네, 맞습니다. 실은 변명거리가 필요하다는 게 진짜 변명입니다. 케케묵은 오래된 책 한 권이 왠지 갖고 싶어서 소나기를 있는 그대로 다 맞으며 헌 책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껏 냉소주의자라고 말해왔던 스스로를 부정하는 게 될까봐 저를 위한 적당한 변명거리를 만든 겁니다.
“찾고 있는 책, 어떤 책이에요? 도와줄게요.”
“어... 그러니까. 제목이나 작가는 잘 모르겠고 1년 꿇은 여고생이 어떤 학교에 전학을 가서 거기서 다른 학생들이랑 만나고 뭐 그런 거였는데...”
학생은 어물어물 힘겹게 설명을 이어가는 저를 배시시한 미소로 마주보고 있더니
“그거 혹시 이 책 아니에요?”
라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건넵니다. 굳이 펼쳐 볼 필요도 제목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거 참 기막힌 우연이네, 고맙다.”
“우연이 아니라 제 능력이에요.”
“능력?”
“사실 전 요정이거든요.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헌책방의 요정.”
말을 마치고는 스스로도 웃긴지 픽 웃습니다. 교복차림에 우비를 뒤집어 쓴 요정이라니 색다르기는 합니다.
어쩌면 전 진짜로 저도 모르는 사이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왔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울한 현실과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현실인 것도 아닌, 독특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판타지 세계에 말입니다.
아무래도 어제는 저 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하루 날 잡고 냉소주의자 한 명을 감동시키려고 작정한 날이었었나 봅니다. 안타깝게도 어제의 일로 제 삶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고 그런 삶을 대하는 제 마음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신명나게 맞은 소나기는 오늘 아침 저에게 콧물과 기침을 선사해주었고 당당함 넘치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무단결근의 패널티는 직격으로 저에게 적중했습니다.
아마 전 앞으로도 사랑에 빠져 웃고 우는 이들에게 냉소를 날릴 것이며 꿈 타령 하는 이들에게는 씁쓸한 조소를 날리겠죠.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어쩐지 그렇고 그런,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 어제로 하여금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과 펼친 적 없는 자기계발서만 가득했던 제 책꽂이에 손때 묻은 낡은 책 한 권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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