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녹슨 포신을 좌우로 돌린다. 화포가 몇 차례 진동한 후, 공터에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제齊를 지내는 엄숙함…… 포신의 끝에서 한 줄 연기 피어오른다. 아주 기-일고도 거뭇한 연기, 노장은 손끝으로 가볍게 돌을 움켜쥐고 연거푸 세 번 연기 주위를 맴돈다. 그것이 적을 위한 연민인지, 혹은 조금 전 갈리아 인들을 짓밟는 ‘코끼리’ 군대의 승전 기념행사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 지금은 숨 막히는 교전의 시간! 백전노장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병졸들이 앞 다퉈 달려간다. 죽음도 불사하는 무엇처럼, 풍전등화였던 청靑국은 노장의 노련한 진두지휘로 적赤국에 연승한다.
-딱
군화발로 녹슨 나무판을 짓밟는 소리, 그들의 약진에는 임전무퇴의 기개도 얼도 혼도 다 녹아있음에 장군의 표정에 승기가 확실해 보인다. 막사에서는 한참 말아두었던 승전 기에 먼지를 털고, 승전보에 먹물 묻힐 시간 기다린다. 끝끝내 적장을 보필하던 선비(士)들마저 제거한 뒤에야 노장은 거액 금 일 천원을 수중에 넣는다. 주변 노인들의 함성이 전장처럼 왕왕 울려 퍼진다. “니네는 아직 내한테 장기로 안 된다니깐 그래……” 속칭 꼰대, 그는 공터의 안주인 역할을 오늘도 톡톡히 해낸다. 완력도 탄력도 부족한 노년의 얼굴들에게서는 지성의 자웅을 겨루는 (그것도 아주 합법적인 방식으로) 장기야말로 고사판인 것이다. 혹은 링 위를 방불케 하는 치열함! 녹슨 포신을 포상 아래에 주차한다. 졸도 임금도 馬도 象도 한데 얽히고설킨다. 이곳 공터 팔각정이야말로 전후의 아수라장을 다 담았다. 그는 머쓱한 체형에 어색한 안경을 즐겨 썼다. 돋보기안경 사이로 보이는 그의 표독스러운 눈은 세상의 진리를 통달한 석가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다 담겨 있는 것. 그가 지나간 길에는 그 흔한 비둘기 한 마리 남지 않는다는 게 이곳 공터의 풍문이다. 개화기 지식인처럼 둥그런 안경이야말로 역설적이지만 그의 완만하지 않은 삶을 말해준다. 아주 완곡하게도, 그의 모난 성격은 둥근 생을 점철한 뒤에야 완연하게 완성되었으랴. 그래도, 그래도 그는 완벽했다. 적어도 이곳 팔각정을 낀 공터 안팎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그가 이 세계의 신이었다. 그의 연승 기록은 평생 깨질 일 없는 공식처럼 공터 안에서 통용되었다. 그날 오후까지는


2.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눈 깜빡이는 방법 아는 건 본능일까? 당연한 것들은 구태여 회자되지 않는다. 매일의 시선이 따닥- 따닥- 끊겨 읽히는 모스부호처럼 순간마다 처절할 지라도 언젠가 꺼질 지라도 그저 당연지사인 걸까? 입버릇처럼 당연지사, 를 달고 사는 그였다. 그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들은 이제 흔해서 인지하기엔 너무도 버거웠다. 이제 온 몸의 촉점에 굳은살이 박혀 가까운 것들을 느낄 수 없고 먼 계절만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소중한 것들은 쉽게 곁을 주지 않는 비밀
문고리를 돌려 밀실을 나가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그가 어느 순간 덜컥 화장실에 갇혔으니 발단은 이러했다. 공터에서 장기를 이기고 따낸 꼬깃한 천 원을 막 손의 열기로 다림질하는, 찰나였다 천 원으로 자주 가는 구멍가게엘 버릇처럼 들러 일상적으로 두유 한 병 손에 막 쥔, 찰나였다 요의를 느껴 가깝지만 인적 없어 단골인 화장실에 들어선, 찰나였다 볼일을 마치고 밖을 나가려는데 문고리 돌리는 법을 빗장처럼 잊었다. 세상이 아득하다 새하얗게 둘러싸인 흰색 육면체의 난반사 그가 어지럽게 화이트아웃 강설과 산안개로 인해 시계가 하얀색 일색이 되어 원근감이 없어지는 현상
한다.
‘그기 누구 있으면 대답 좀 해 주소’
짜증 섞인 목소리는 누구를 향하는지 맥없이 고꾸라졌다. 삼십 분을 씨름을 하면서 그는 손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문고리를 밀어도 당겨도 보았다. 문짝 전체를 등으로 밀어도 보고 파르르 떨리는 몸 기대도 보았다.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마치 밥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기억 속 ‘문 여는 방법’을 관장하는 뉴런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다시 휴대전화에 손이 갔지만 그 누구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세상에 매일 가는 동네 화장실에 갇혔으니 체면이랄 것이 말이 아닌 것
‘내가 치매기가 있나?’
처음엔 문을 여는 방법을 잊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납득할 수 없었다. 주먹으로 내리치고 몸통으로 밀어 봐도 도통 밀리지 않아 젖은 바닥에 주저 않은 이래로 전혀 자신의 상태를 믿지 못했다. 신개화기로 인해 이른바 ‘노인’이 알지 못한 사이 비밀스런 문이 생겨난 것이라 믿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 보아도 눈 깜빡임처럼 쉬웠던 그 일련의 동작이 전혀 기억에 남질 않았다. 밤새 갈무리했던 이파리를 단 한 번의 용오름이 삼켜버린 것 같아서, 이제 힘도 없고 아는 것마저 남질 않은 존재가 돼버린 것 같아서 두려웠다.
따라가지 못한 생채인식 기능이라도 추가된 것인지 애먼 엄지의 지문을 이곳저곳에 묻혀도 보았으나 전부 실패, 문득 변기에 앉아 나약했던 장기판 위 적군을 원망해 본다. 오늘 한 번만이라도 그를 장기판 위에서 제압해줬다면…… ‘천 원을 받을 일 없어 두유를 마시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소변이 마렵지 않았을 테고, 그럼 이렇게 화장실에 갇힐 일도 없었을 텐데!’
그가 되뇌이는 원망이 부질없이 깨진 거울에 맺힌다. 노인은 오랜만에 타의 반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주름을 세는 일은 낭만적이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게 아니니까 수 천 수 만 번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접히는 계곡, 아로새겨진 감정의 굴곡이 찬란하다. 이렇게 오래 살았구나 하고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 손을 가져다 댄다. 쪼글쪼글한 두 손이 맞닿자 합장하는 부처 같기도, 기도하는 신부 같기도 하다. 분명 그는 다리 한 쪽을 괴지 않고도 반가사유(半跏思惟) 중이었으니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 거울에서 손을 푸드득 새처럼 뺀다. 날아오르던 손이 황망히 주머니에 꽂혀 숨죽여 운다. 잠깐 새를 묻힌 거울 속 남자가 그를 보고 그도 남자를 바라본다. 초면인가? 어떤 당신이 누구인가?
-딱
장기알처럼 문을 들이받아봐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타종하는 추처럼 밀실 속 시간만 꾸준히 지나갈 뿐이었다. 게임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이 눈앞 한 칸마저 이동할 수 없는 무능의 극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쿵, 쿵

그가 머리를 세게 들이받다가 졸도할 뻔 한다.
-쿵, 쿵, 쿵, 쿵
그렇게 두 시간 즈음 지났을 땐 초인 같던 한 남자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거울에 맺힌 노인 그 자신이 참 판박이였던 사람, 노인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초인적인 완력으로 문을 부수고 나타나 줄 것만 같은 한 사람 그는 분명 가자미였다. 生의 말년을 초록 병상에 넙죽 누워 퍼렇게 수혈 받고 있는 모습이 딱 가자미 꼴이었다. 술과 담배를 포기하지 않던 그 가재미,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제 와서 노년을 살아보니 또 부성을 가져보니 그게 참 괴로운 것이어서 왜 이런 이야기들을 실토하지 않았는지 그가 무척이나 미웠다. 병상의 아버지가 염분 게워내고 비틀거리며 달려와 새끼 가자미 안아주길 바랬다. 세상에 남은 노인과 세상에 없는 노인이 가련해, 문득 아무도 없는 이곳 흰색 큐브 속에서 궁상맞게 고해한다. ‘다 커버린 어른들도 무척이나 외로운 걸’ 등 굽은 노인이 웅크려 새우잠에 드는 변기 위 순간의 몽유(夢遊)였다.

잊고 있던 해묵은 기억을 마저 떠올려 본다. 먼지 속을 헤집자 언젠가 아버지의 집에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동시에 젊었던 두 노인이 적(敵)이 되는 순간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쯔쯧 네 형이 사업에서 한 번 좀 미끄러졌다고 사람을 무시해?” 노발대발하는 아버지가 역정을 내다 말고 헛기침을 한다.
“아니 생각해 보라고, 거즘 장부가 큰일을 하다가 미끄러 질수도 있는 거고 그깟 푼돈 좀 빌려서 늦게 갚는다고 그 돈이 어데 사라지던?”
“아버지!”
“그래서 형이랑 절연하고 네 마누라랑 네 가족들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게냐. 형이 어디 아예 나락에서 뒹굴 사람이냐? 너는 네 가족도 못 믿어줘?”
호통 치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몰아친다. 그러다가 말고 서랍 한 켠에 쟁여놓았던 나뭇가지 잔 부리를 긁어모아 말한다.
“나뭇가지 하나는 이렇게 부서뜨리기 쉬운 것이여,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개를 겹치면 잘 안 부서지잖어 니도 형이랑 협심해서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니만 잘난 맛에 혼자 살면 혈연이 대체 다 무슨 소용이여?”
뻔한 소리를 듣는다. 항상 형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걱정이 마냥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둘째 놈에게, 그것도 형의 사업 실패로 빌려준 돈을 허탈하게 날려버린 장본인을 나무라기만 하는 건 아무래도 서운했다. 피 같은 돈이 목청에 고이다 목청을 침수시켜 목이 멘다. 그날 이래로 노인을 외면하고 살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 편한 말을 마음속에 후벼놓고 나름대로 간간히 버텨 왔다. 그가 바다에 살았던 때에도 공터로 이사왔을 때에도 그는 항상 절실하게 살아왔다. 빌려준 돈은 어느새 다 채워졌지만 마음을 할퀴는 상처들이 훈장처럼 서로에게 남았다. 그렇게 세월 앞에서 다 늙어버린 노인과 형을 다시 만난 건 아버지의 병상 앞이 마지막이었으리라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자 그는 이제 말이 없었다. 그가 왜 공터에서 일등 가는 사람이었는지 대변해주는 대목일까 변기 위 토르소 목·팔·다리 등이 없는 동체만의 조각작품. 인체의 구간(軀幹), 몸체[胴體]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에서 연유된 조각용어
는 가만히 굳어 생각에 잠겼다. 문을 여는 방법이 기억난 것도 아닌데 한쪽 턱을 괸 그는 반가사유를 넘어 이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방불케 했다. 입술을 깨물고 냉정한 해답을 고민하는 긴 적막, 서슬 퍼렇게 가른 건 다름 아닌 짧은 몸통의 바퀴였다. 바퀴라는 이름은 꼭 이름처럼 구를 수 있을 것 같고 접힌 날개로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장고 없이 끌리는 대로 사는 저 벌레가 삼라만상과 철학을 앞선다. 저 바퀴는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중일까
납작하게 접히는 몸으로 화장실 문틈을 오가는 놈이 그에게로 전력 질주하자 노인은 혼비백산하여 변기 위로 다리를 접어 올린다. 오전에 장기판 위를 호령하며 포신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위의는 이제 오간데 없었다. 처절하게 인간의 본성을 만나게 하는 건 역시 벌거벗은 벌레일까? 증폭된 두려움과 갇혀 있다는 고독감이 바퀴벌레마저 무섭고 또 부럽게 만든다. 바퀴처럼 구르고 싶다 바퀴처럼 날고만 싶다. 이 비좁은 방을 탈주하고 싶다.
‘나에게도 날개를 줘, 문을 세게 쥘 수 있는 무수한 다리를 나눠줘 납작한 가자미처럼 엎드려 문 아래를 넘나들 수 있는 부드러움을……’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 바퀴에게 뿌려댄다. 천진난만한 노인과 벌레의 물장난이 사뭇 의식처럼 고요해 바퀴가 쫄쫄 달아나는 포즈를 놓칠 뻔 했다. 덕분에 건조한 손에 물의 악공들이 다녀간다고 바퀴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 할 판 하지만 벌레는 이제 가버렸다. 가까이에 두기는 어렵고 사라지면 공허한 것, 젖은 기억을 복기해 본다. 아, 우듬지에 콕 박혀 있다가 내려오는 한 생각이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으로 내려온다. 휴대전화를 켜서 형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통화 연결음이 자맥질을 하면서 귓바퀴에 파랑을 만들자 그 얼마 만에 거는 전화인지 실감한다. 이렇게 궁상맞고 찌질한 상황에 와서야 형님에게 전화를 건다. 가족에게는 문을 여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해도 꼭 될 것만 같다. 이렇게나 다 커버린 황혼의 투정이 먹힐 것만 같다고, 그는 생각한다.
안 받는 전화는 낚시질을 닮아서, 원하는 통화가 낚이지 않았을 때엔 상실감이 크다. 항상 전화하라던 가족의 말들을 흘려보낸 그였다. 괜스레 변기 물이라도 한 번 내려 보자 물이 나선을 이루며 쓸려 나간다. 두어 번 물을 더 내리고 나서야 전화기를 덮었다. 고작 전화기를 덮었을 뿐인데 대어를 놓친 것처럼 손맛이 쓰리다. 다시 전화기를 루어(lure)처럼 주머니에 넣고 입질을 기다린다. 형님은 분명 바쁜 게다.

 

3.

바퀴가 떠난 곳을 오래 바라보다가 밖에서 들리는 사람 소리를 놓칠 뻔 했다.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려가 귀를 붙이자 소라에 귀를 댄 것처럼 바다 포말이 오른다. 소라의 바람 소리를 듣는 건 괴괴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입에 오르내린다. 그렇게 사람 소리를 귓바퀴에 담다가 첫 탈출 기회를 허무히 놓치고 말았다. 사실 문에 입을 맞추고 나 여기 있어요 말할 용기가 없었는지, 이 처참한 자존심을 도통 꺾을 줄 몰랐다.
‘나 좀 도와주세요’ ‘여기 사람이 갇혀있어요……’ 비릿한 결심들이 마음속에서 음성이 되질 못하고 무너진다. 이도 저도 못하는 그가 모래성처럼 으스러지고 있다. 지팡이 대신 그물처럼 얽힌 타일을 손으로 쓸다가, 바다에 갔던 일을 끌어 올린다.

공터에 인접한 집을 얻기 전에 그는 분명 바다에 살았다. 바다에 살면 그 아득한 색감처럼 청명해질까봐, 바다의 좋은 점만 보고 덜컥 바다로 떠난 그였다. 아내와 자식들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의 고집에 백기를 놓았다. 다시 공터에 가까운 이곳 동네로 이사 오자고 한 것 또한 다름 아닌 노인, 제멋대로인 그였다.
‘공터로 이사 오자고 한 걸 가족들이 승낙하지만 않았어도……’
남몰래 혀를 차며 이번엔 아내와 자식 탓을 해볼까 했다. 버릇처럼 그렇게 살아 왔으니까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매일 밥 먹듯이 열어 재끼던 문고리의 용법을 도무지 몰라 무시로 열리던 문의 감사를 모르고 황망히 살았다. 이윽고 왈칵 참을 수 없는 물이 얼굴에 맺히자 스스로가 얼마나 멍청한 질문인지 생각했다. 그 아집에 감히 답을 할 수 없는, 오답 가득한 질문의 삶이었다. 어떤 감사에는 도무지 ‘탓’을 들먹이지 못하고, 씁쓸한 일은 타인의 이름부터 들먹이니 그 얼마나 어리석을까? 큐브처럼 육면이 노인을 쏘아보는 이 하얀 공간이 한 평짜리 형벌 같다. 밀실 속에서 덜컥 스스로를 탓해보고 싶다.
아내에겐 방이 없었다. 자식들에게 방을 하나씩 내어주고 안방을 노인 맘대로 꾸민 까닭에 그나마 방이랄 건 그녀에겐 주방이었다. 그 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파를 어슷 썰다가도, 어묵을 간장으로 볶다가도 노인의 신경질에 따라 그 조리법을 바꾸곤 했다. 노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는 그걸 자랑이라 여겼다. 밀실 속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너무 당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노인은 덜컥 스스로를 원망하고 싶다.

바퀴가 썰물처럼 떠난 곳을 눈으로 다시 쫓다가 이번엔 바닥에서 명함 한 장을 발견한다. 전화를 받지 않는 형님을 생각하다가 명함을 주워 만지작거린다. 긴 숫자가 뎅강뎅강 하이픈(-)으로 잘려 있는데, 토막 난 숫자들이 가슴을 세게 때린다. 공권력을 출동시키기는 공연히 죄스러운 것 같고 이 처절한 외로움을 위해 가벼운 번호에 모르는 전화를 건다. 그는 이기적인걸까 먼저 남의 화장실 바닥을 무단으로 침략했으니, 저 대출홍보용 명함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내 생각이 다시 떠오르고,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젓는다.
“사랑하는 고객님 안녕하세요 고객님! XX신용의 김미영 팀장입니다. 소액 대출은 무담보 300만원부터……“
노인이 사금파리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를 한데 붙여다 청자 같은 목소리를 건넨다.
“흠, 안녕하시오 다른 게 아니라 조금 도움이 필요해서 그러는데요”
“네 고객님,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신가요?”
“그게 아니라, 내가 시방 지금 화장실에 갇혀서 밤이 되가는 판인디 나 좀 도와 주겄소?”
-뚜, 뚜, 뚜
심박처럼 전화가 끊겨 한 풀 짜증을 더했다. 세상은 왜 이리도 불친절한지, 그럼에도 119나 아내에게 자존심 상 전화할 염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바다도 시간이 되면 천천히 이불을 덮고, 공터도 숨을 참고 잠수하는 것처럼 어둠에 담청색 이파리를 부비고 있었다. 화장실 한 칸 안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방법 잊은 남자가 다시 원통형으로 몸을 만다.

-따르르릉
해가 넘어가기 일보 직전 형에게서 전화가 온다. 형은 실패한 사업가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걸 아직도 목표로 삼는 듯하다. 그에게 이번 감금을 빌미 삼아 전화하는 것도 달갑진 않지만, 한 줌 구원이 될 것만 같아 급하게 낚싯줄을 당겨 휴대폰을 귀에 건다.
휴대폰은 오간 데 없고 변기에 빠진 금속 덩어리 하나가 침잠하는 다이빙 벨로 수명을 다한다. 허공을 메우던 벨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 그 마저도 없다. 나선의 물살 속에 가라앉은 구식 휴대폰을 바라본다. 거기에 얼만큼의 목소리가 담겨있었을까? 불구가 된 기계가 물을 만나 녹슬 준비를 한다. 마치 해탈 이후처럼 단말마조차 없는 저 묵묵함에 노인이 묵상한다. 오직 형의 목소리를 통해 한 줌 탈출의 구원만을 바랬던 업보인지 가라앉은 기계가 혼자 유유히 배수구 너머로 건너가려고 하는 것만 같다. 그걸 스스로도 알지만 인정하기 힘들다. 거친 세상에서 자수성가를 위해 얼마간의 독기를 머금는 건 당연한 일, 그리고 우둔한 형으로 인해 더 거칠어진 노인의 삶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습하고 끈적거리는 화장실 내부, 무결하다 믿었던 그 자신이 덧없게만 느껴진다.
‘나도 데려가 줘, 나도 이만큼이나 녹슬었는데’
휴대폰이 변기에 빠진 덕에 그는 이제 김미영 팀장과도 전화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나갈 수 있어도 결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화장실 노인이 학다리로 선다. 세면대 위에 두 손 올리고 다시 거울을 보자 구석에 살짝 깨어진 부분이 보인다. 유리에 빗금 친 부분은 마치 틀린 문제를 묘사하는 빨간펜처럼 굵게 그어져 자신의 삶을 감점하는 듯 했다. 노인의 얼굴이 그 속에 마구잡이로 머물다가 거울을 빠져 나간다. 다시 이곳 화장실 바깥에 빗금처럼 빗장 걸린 거라고 생각해 본다. 도무지 백주대낮 익숙한 화장실에 갇혀 있는 스스로가 밉상이기에 누군가를 탓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 이 곳은 미궁이고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이겠지 감히 내가 평범한 날 멍청하게 갇힐 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누군가를 더 탓하고 싶은데 여기 저기 둘러봐도 핑계 댈 사람이 없다. 가족에게서 등을 뺀 점과 공터를 제멋대로 활보하던 심보를 탓하고 싶은데 이곳 밀실에는 그 누구도 없다. 오직 거울에 난반사하는 그의 얼굴만이 깨진 얼굴 속 분신처럼 나뉘어 있다. 스무 개 정도의 눈동자가 노인을 또 나누어 보고 노인은 낯빛 바랜다.

돌이켜보니 형님에게 해줄 말이 꽤나 많았던 것 같다. 다른 말들은 집어 넣어두고, 사업이나 잘잘못 같은 거 부모님에 대해 이랬어야한다 저랬어야 한다는 둥 그 많은 소란은 넣어두고도 말이다. 그냥 푸념처럼 잘 지내냐고 한 마디 할 수 있었다. 혹은 아이들은 잘 지내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행여나 바다엘 같이 가서 도요새처럼 꺽꺽 울어보자고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의 음성에 내 귓바퀴를 맞추고 소라껍질처럼 말소리를 증폭시킬 수도 있었다. 형님이 전화를 받았더라면 진정 그렇게 해볼 요량이었을까? 그는 다 빠진 머리 긁으며 의문부호들을 살갗에 내건다. 수많은 물음표 갈고리들이 피부를 찔러 그는 이제 조용히 가라앉는다. 다시 와온 바다에 살 수 있을 것도 같아 자꾸만 바다에 귀의(歸依)한다. 누군가의 탓은 참 편하지만 씁쓸하다는 생각을 화장실 차가운 벽에 묻힌다.
너무도 쉬운 문고리 돌리는 방법 잊은 남자가 벨소리의 소멸을 아쉬워하다 그 음악 다시 생각해보니 꽤나 고즈넉했는데, 이젠 오간데 없는

4.

불현 듯 문고리 돌리는 방법이 조금은 떠오른 것인지 노인이 문에 다가선다. 다시 귓바퀴를 가져다 댄 철문에서 익숙한 음성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먼 곳 형님의 목소리인가? 아버지? 둥그런 문고리에 아귀를 맞추고 반 바퀴정도 돌린다.
-철컥
손잡이가 분명 돌아가는데 그 다음을 도통 모르겠다. 물레처럼 돌아가는 손잡이에 얼마간의 슬픔을 물처럼 얹어야 할까? 그렇게 퍼내고 퍼내서 이 밀실 안에 물이 꽉 차면 우리는 부유물로 쏟아져 나갈 수 있을까? 자꾸만 비린 몸통이 갈지자로 흔들린다.

잊었던 것들이 아직 남았나 생각해 본다. 이 비좁은 영역 안에서 낡은 것들을 모두 게워내야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하는 기억들에 적을 두고 창틈 새로 줄어가는 빛에 염장된다. 손잡이가 분명 돌아가는데, 그 단순한 다음을 잊은 남자가 형벌처럼 자리에 선다. 빛바랜 철문 앞에는 그 무엇도 없는데 밀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밀어서 여는 것이 아닌 것만 같아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수문장이 떡하니 서있는 것 같다.
다시 공터에는 말발굽 딸깍이는 소리가 가득했다. 두유를 먹겠다더니 오간데 없는 그의 행적을 노인들도 궁금해 하고 있던 것, 구둣발 또각이며 馬처럼 이리 저리 옮겨 다녔다. 게중에는 분명 그와 장기를 두었던 노인 김씨도 있던 것 같다. 사실 노인의 장기 연승신화는 사실이 아니다 퇴역군인인 김씨는 왕년의 실력 때문인지 특히나 포와 차를 잘 다뤘다. 처음 그와 합을 나누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목격자 없는 패배를 거두었고, 과묵한 김씨와 달리 그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공터 노인들의 자존심 싸움의 주축이었던 장기에서마저 패배한다면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오인했는지, 공터 방방곡곡에 나무 쐐기처럼 허풍을 박아 넣고 다녔다.
오줌발을 늘이며 생각했다 일 패 정도는 괜찮지 않겠느냐고, 더러 무패보다 거룩한 한 번의 패배가 승리를 빛나게 해준다고 말이다. 오줌발이 점점 짧아지면서 그는 생각했다 저 밖에서 소리치는 노인들의 음성에 응답하고 싶다고, 실은 그들이 재잘거리던 시초부터 그는 숨죽였는지, 모른다 무패의 장군 탑골 공원의 신화가 화장실에 갇혀 모래성으로 무너지길 원치 않길 바랐는지, 모른다 김씨에게 힘껏 패배한 일이 까발려지지 않길 원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관처럼 누워 초라한 그를 목도할 수많은 고양이 눈, 그 반월 종주근이 두려워 숨죽였는지 모른다. 문 여는 방법에 좀 더 대해 생각해보다가 공터 복판에 서서 나는 무적자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 여기 있네, 여기 잘 있는데 뭐가 그리도 두려운지 모르겠네’
응어리 진 말들이 또 맴돌이 전류처럼 몸 속에 머문다. 스파크 튀튀거리는 이 따가운 생각들이 바깥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다.
‘나 여기 잘 있네, 김 씨에게 장기를 진 일, 돌이켜보니 내게 주렁주렁 남은 이 허영심을 절구로 부숴버리고 싶네’
작은 창문 너머로 김씨의 머리꼭지가 보인다. 팔각정을 닮은 그의 팔각모가 어슴푸레, 공터와 잘 어울린다. 공터의 안주인 자리에 김씨가 잘 어울리는 것도 같다. 아, 숨바꼭질도 아닌데 들켜선 안 될 것 같다. 아니 이제 들키고 싶다. 이 비좁은 방을 부수고 꾸덕꾸덕한 자존심을 길게 꺼내 변기에 내리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불러주고 싶다. 다정하게 피워내는 활자가 파랑을 건너와 우리를 붉게 물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비좁은 공간을 나가면 제일 먼저 형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우선 그동안 못다 건 전화가 바쁜 생애 때문이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탓해볼 것이다. 그 다음엔 아버지의 빈소에 두 꼬부랑 노인이 찾아가 조금 늦은 헌화를 할 것이다. 꽃을 담았던 비닐봉지가 기류를 타고 하늘에 올라 향기를 주고받는 전신(傳信), 수많은 꽃봉지를 즐겁게 놓쳐 늙은 봉분 찾아가는 길목마다 꽃향기 흩날릴 것이다. 화장실 안에서 새우처럼 몸 말던 노인이 반짝 일어선다.
다음은 사랑하는 가족들, 변변찮은 고집 때문에 흠집 난 마음에 호 입김을 불어줄 각오 세운다. 그 작은 입김이 젠가처럼 노인이 세웠던 위신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평생 장기밖에 모르던 그가 자존심 한 도막을 빼서 꼭대기에 쌓는다. 뻥 뚫린 나무의 탑 가슴으로 바람이 통하고 말소리가 시원하다. 다 부르튼 아내의 손을 못 본 척한게 씁쓰름해 세면대가 자꾸만 싱크대로 읽힌다. 그 속에 쪼글쪼글한 손 두 개를 담그고서야 이 멍청한 손 두 개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접시였는지 생각해 본다. 아내의 손을 고무장갑처럼 감싸주고 싶다. 아직 핏기 흐르는 손으로 비슷하게 주름진 손을 덮어주고만 싶다.
-쿵
문 앞에 다가가 선다. 잊었던 어려운 암호들이 기호처럼 머리맡에 올라 이제 두려움이 가시는 듯하다. 노인은, 아니 그가 문고리를 잡는다. 차가운 문고리에 금속성 악수를 건네자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마치 처음부터 잊었던 적 없는 기억처럼 문고리가 턱 하니 잡힌다. 불러주고픈 이름들이 너무도 많아 빨리 이 비좁은 나날들을 깨버리고 싶다. 기나긴 멍청한 춘몽에서 바삐 벗어나고 싶다.
“어지러운 생에서 그만 문고리 돌리는 방법을 잊었습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고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한 글자씩 내뱉은 첫 마디다.
“하지만 마냥 잊고 살진 않을 게야.”
변기 속에 가라앉은 휴대폰이 사명을 다 하듯 울린다. 화장실 인근에서 수많은 발자국소리 들리고, 구수하게 국 끓이는 아내가 떠오른다. 까마득히 어색해진 자식들이 그를 가재미라 부르며 달려온다. 가슴을 세게 때리는 고사리들을 다 끌어다 안아주고 싶다. 위태로운 생의 마지막 건반 위에서 그는 미끄럼을 멈추고 당당히 걷고 있다. 포신(砲身)을 겨누는 날카로운 ‘장군’ 앞에서 이제 또렷한 ‘멍군’을 외치려고 한다.

-철컥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이 반나절 만에 열린다. 길고도 짧았던 시간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나비의 인고를 경험한다. 칭칭 하얀 실타래를 감고 어둠 속에 담금질된 그가 순백의 변신을 오마주하는 장면이었다. 화장실 속 약간의 어둠을 먹고 자란 탈피 그는 낡은 자신을 벗어 던진다. 구시대의 유물이 미라처럼 눕고 새로운 내가 날개를 편다. 화장실 속에서 꿈틀거리며 경험한 이 찬란한 굴욕이, 빛의 날개를 펴는 듯 부드러운 유선형이다.
문 바깥은 딱히 달라진 거 없는 그냥 오늘이었다. 당연한 것이 그저 반나절 지나 똑같은 하루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팔자주름이 더해지고, 분명 깊은 골에는 미소가 있었다. 깊은 주름의 골, 천길 크레바스에서 실족했던 노인 가까스로 빠져나와 일어선다. 삐거덕 거리던 철포는 고개 갸우뚱거리다 윤활유 머금고 청동 브라스를 분다. 탈출의 축포를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병졸들은 쏟아져 함성을 지르는 듯, 선비들도 환희의 시를 지어내는 듯 문무를 불문하는 공터가 장기판처럼 소란스럽다. 마른 땅을 밟고 한 걸음씩 내딛는 그의 눈, 기묘한 원근감이 거기 머문다. 한쪽 눈에는 무시하던 공터 사람들이 맺힌다. 한쪽 눈에는 멀리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족들이 머문다. 이윽고 딸그닥 거리던 공터 사람들의 말발굽 소리, 노인들은 전설처럼 서로의 거친 갈퀴를 쓰다듬어준다.
인간의 손은 참 다정한 모양이어서 다섯 갈래로 나뉘어 있지- 서로 맞잡기에 적합한 손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노인의 손, 맞잡아 준다. 공터를 바람처럼 빠져나온 노인들이, 김씨가, 이름을 모르는 아무개 씨들이 화장실 앞에 빛의 사자처럼 서있다. 꼭 암담했던 하루를 마중 나온 그의 편인 것만 같다. 그도 괜스레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달라진 모습에서 노인들이 무언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느낀다. 그 짧고 토막 난 시간 속에서 어긋났던 빗금이 다 풀어지고 있었다. 풀어진 빗금들은 몸 부비며 열상 입힐 듯 이글거렸고 그 불꽃같은 틈바구니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깜박 잠들었다고 믿어 주시게들, 많이들 걱정했는가?”
노인들이 조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거린다. 봄바람에 꽃가루 터는 홀씨들 같다고 생각하다가 그는 꽃덤불 사이를 날았다.


5.

그는 결국 바다엘 갔다. 혼자서는 아니고 거창한 동행 또한 없었지만 몇몇의 소중한 사람들을 챙겨 갔다. 거기에서 인간이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개펄에 잔뜩 묻혀놓고 온다. 바다가 달콤하게 밟힌 진득한 멍자국, 물론 공터의 生을 잊은 것 또한 아니라는 후문
바다를 철컥 돌리자 안쪽에서부터 왈칵 쏟아져 나온다. 짧은 이름들 사장에 적어내면 차디찬 썰물이 삼켜간다 해도, 시리도록 사랑해 적어낼 얼굴들이 너무 많은 시간이다. 어여쁜 단어들이 그를 안아주는 순간이다. 그는 다시는 문고리 돌리는 방법 잊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우린, 언젠가 어딘가에서 문고리 돌리는 방법을 잊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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