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풍경(soundscape)이란 소리를 뜻하는 ‘sound’와 경관을 뜻하는 접미어 ‘scape’의 복합어로, 귀로 파악하는 풍경을 의미한다. 1960년대 북아메리카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생태학 운동을 배경으로, 캐나다 현대음악의 거장인 머레이 셰이퍼(R. Murray Schafer)가 창시한 용어다. <전대신문>은 우리 대학의 자연, 학생활동, 역사 등의 주제로 다양한 소리를 수집해 1602호(3월 18일)부터 연중 기획 보도 중이다.
 
▲ 오늘날 5·18광장은 과거보다 비교적 고요하고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소리로 채워져 있다.
봉지의 둥근 ‘O(5)’ 모양, 연못을 둘러 싼 ‘하나(1)’의 길, 봉지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여덟(8)’ 갈래의 길. 우리가 흔히 봉지라고 부르는 푸른 잔디밭 공간의 이름이 ‘5·18광장’인 이유다. 넓게는 잔디밭을, 좁게는 백도 앞을 의미한다. 5·18광장은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학생들의 ‘시위집결지’였으며 민주화를 외치는 투쟁의 목소리는 그곳에 가득했다.
▲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5·18광장에서는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진은 1988년 4월 18일 열린 민정당 낙선 및 민주승리를 위한 광주시민대토론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최완욱 총학생회장의 모습
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전국 대학을 비롯해 우리 대학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 행렬이 이어졌다. 우리 대학 내에서도 특히 5·18광장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장소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구속학생 즉각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유신 투쟁을 벌였다.
 
모인 학생들은 정문과 후문을 향해 행진하기도 했다. 학교 밖으로 나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수호를 향한 바람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학교 밖으로 나가려는 시위 학생들은 정문과 후문에 다다라 경찰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학생과 막으려는 경찰 사이에서 연막탄과 최루탄 던지는 소리가 나오고, 흩어지는 학생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학내에 시위가 격해질 때면 경찰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최루탄 가스가 터지면 우리 대학 학생들은 물론 정문 상인들까지 고통스러워 했
다.

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9월 개학을 한 우리 대학은 비교적 고요했다. 학내에 잠복해 있는 사복경찰 때문에 시위가 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위를 위해 학생들을 모으던 주요 장소는 5·18광장, 인문대, 일생 앞 등지였다. 시위 주동자가 ‘모입시다’라고 외치면 옆에 있던 학생이 전단을 이리저리 뿌리며 학생들을 모았다. 하지만 사복경찰이 잠복해있으니 ‘모’라고만 말해도 바로 체포될 정도였다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학생들은 옥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백도 옥상에 올라가 밧줄로 몸을 감고 매달려 구호를 외치며 전단을 뿌리는 등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 1982년 10월 12일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옥중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이후 학내에는 연일 시위 소리가 들렸다.
82년,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 열사가 옥중 단식투쟁 중 사망하자 학내에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최루탄을 발포하는 가스차가 군인들과 함께 학내에 돌아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노랫소리도 가득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1980년대 내내 우리 대학 학생 사이에서 불렸던 ‘5월의 노래’다. 누가 가사를 지었는지, 누가 처음 불렀는 지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5·18광장 잔디밭에 누워 학생들은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전대방송 라디오를 통해 들리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나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은 학생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 1988년 4월 15일 열린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 및 민중생존권 쟁취 대회의 모습
총학생회가 없었던 84년 5·18광장에서는 학내 문제 관련 공개 토론회, 총학생회 선거 유세 활동 등이 이뤄지며 학내 사안과 학생자치에 대해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5월이면 추모기간을 가지며 여러 행사를 진행하며 엄숙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횃불을 들며 행진하기도, 나무모형에 독재정권 관련 문구를 적어 불태우는 화형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추모행사는 반독재를 외치는 시위로 이어졌고 학외로 나가며 경찰과 대치했다. 이후에도 1987년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 6월 항쟁 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 추모제와 4·19혁명정신계승제, 국가 정책에 대한 토론회 등이 5·18광장에서 열렸다.
▲ 1987년 11월 열린 총학생회장선거 연설회 모습
5·18광장이 시위 소리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잔디밭에 앉아 수다 떠는 학생들의 소리, ‘서클’이 공연하는 소리도 있었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느라 철제 도시락통과 젓가락이 부딪히며 들리는 쇠 소리, 현재 제1학생회관(일생) 위치에 있던 매점에서 과자를 사와 먹는 소리가 들렸다.

2000년대부터는 시위보다 학생총회가 열리거나 총학생회 공청회가 열리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공청회나 기자회견이 열릴 때면 백도 앞에서 열렸던 과거와 달리 일생 앞에서 보다 소규모로 열리는 추세다. 최근에는 학생들이 돗자리를 펴고 휴식과 오락을 즐기는 소리를 더 자주 들을 수 있다. 봉지 분수에서 쏟아내는 물줄기 소리는 평화로운 광장에 분위기를 더한다. 불리는 명칭도 5·18광장보다는 ‘봉지’로 불리며 ‘봉치(봉지에서 치킨먹기)’, ‘봉피(봉지에서 피자먹기)’ 등 학생들 사이에서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잔디밭에서 치킨, 피자 등을 시켜먹느라 배달 오토바이가 오가는 소리, 전화로 배달기사와 학생들이 위치를 찾는 소리가 광장을 채운다.

과거, 시대의 부름에 답했던 청년들의 열띤 목소리는 오늘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로 다시 차오르기도 한다. 지난 2016년 우리 대학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시국행진을 했다. 학내 곳곳에서는 하야를 요구하는 대자보로 가득했다. 시대가 부를 때 우리는 여전히 답하고 있다.

오늘, 5·18광장에 서 있는 당신이 듣고 있는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어떤 소리가 광장에 가득하길 바라는가? 다른 때보다 특별하게 다가오는 5월의 전남대 캠퍼스를 눈을 감고 소리로 느껴보자.

자문 및 참고자료 : 김병인 교수(사학), 홍덕기 교수(경제), 전대방송 13기 조규백선(경영·79),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전남대학교 박물관, 『전남대학교 50년사 1952-2002』(전남대학교출판부, 2002)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