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하게 웃는 윤한봉 선생과 신경희 여사
윤한봉은 1970년대 학생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로 5·18 주모자로 수배중 망명하여 미국 내 한인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사회활동가이다. 1980년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하고, 임수경의 방북과 판문점을 통한 귀환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도 윤한봉이다.

미국에서 민족학교 소사(小使)에 만족했던 것처럼 귀국 후에도 돈이나 권위가 주어지는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스스로 붙인 별명대로 ‘합수(合水)’의 삶을 실천했다. ‘합수’는 전라도 말로 “똥과 오줌을 섞어 만든 거름”이란 뜻이다.

1947년 강진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어난 합수 윤한봉은 1971년 전남대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하여 불철주야 학업에 정진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모범생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선포에 반대하면서 본격적인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축산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4년,〈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의 전남·북 지역 책임자로 지명 수배되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2010년 9월 재판부는 이 건에 대한 재심에서 36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윤한봉은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되어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주모자로 신군부의 수배를 피해 도피하던 중 1981년 4월 지인들의 도움으로 화물선 레오파드로에 숨어 미국으로 밀항해 정치적 망명자가 된다. 미국에 정착한 그는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재미한국청년,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 해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한 운동가로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반전반핵 세계평화운동, 제3세계 연대운동에 헌신했다.
▲ 귀국 인터뷰중인 윤한봉 선생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5월, 수배에서 해제된 윤한봉은 12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 후 광주에서 민주미래연구소를 설립하여 5·18정신 계승을 위해 헌신하다 2007년 6월 지병인 폐기종으로 타계했다. 그는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2017년 2월, 우리 대학은 고인에게 입학한지 46년만에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그해 11월 14일, 전 민족미래연구소 소장 윤한봉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농업생명과학대학 2호관 205호에 합수 윤한봉 기념강의실을 조성했다. 합수 윤한봉의 부인 신경희씨는 “청년들의 교육이 제대로 서야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합수의 신념을 실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며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을 전달했다.

어느 강연에서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합수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주화를 갈구하던 역사적 혼란기에 민중과 함께 살고자 했던 윤한봉의 삶을 잊지 말라는 큰 어르신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12년 망명생활 동안 나는 외롭고 슬프거나 괴롭고 힘들 때마다 5월 영령들과 옛 동지들을 생각하며 이겨내곤 했는데 돌아와 보니 5월 영령들은 모든 영광과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앞이 가려진 채 말없이 누워 계시고 옛 동지들은 진달래처럼 거의가 다 변해 있었다. 변했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미국화 되었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변함 없는 전라도 촌놈 ‘합수’로 살다가 돌아가자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운동하다가 돌아가자고 그렇게 무수히 다짐하며 살다가 돌아와 보니 나는 박물관에서 방금 나온 사람, 깡통 안 찬 거지, 부시맨, 골동품, 상처 안 받은 사람,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지라도 5월 영령들과 지난 12년의 망명생활과 헌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을 생각하며 이겨 나갈 것이다. 영원한 그리움의 바다와 속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이겨 나갈 것이다. - ‘윤한봉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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