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라는 시간적 범주에서 어느 한 때를 매듭해서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재생시키려는 인위적인 장치가 시절(時節)에 담겨져 있다. 기억은 시간의 산물이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다. 중양절은 축제이자 공동체를 다지는 행사로 이어졌다. 올해 음력 9월 9일은 양력으로 10월 6일이다. 양수(陽數) 중에서 가장 큰 양수인 9의 결합이 중양(重陽)을 뜻하므로 9월 9일을 중양절(重陽節)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은 양(陽)을 상징하는 홀수는 음(陰)의 짝수보다 훨씬 중시했다. 일종의 홀수숭배사상이다. 특히 달력으로 홀수가 겹친 중수일(重數日)은 중요한 시절로 지켜졌다. 정월 1일은 원정(元正) 혹은 원단(元旦) 정조(正朝), 3월 3일은 삼짇날, 5월 5일은 단오(端午), 7월 7일은 칠석(七夕),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다. 11월 11일은 별도의 절일로 기념하지 않았다. 아마도 10旬 중심의 날짜[시간] 관념을 위시한 동양의 시긴 질서에서 11일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중양절의 성립 시기는 대체로 후한 말에서 중국의 삼국시기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달력상 간지(干支)기법에서 점차 숫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했다고 보여진다. 특히 9월 9일은 말 그대로 중양(重陽)의 의미가 가장 강한 날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양절은 홀수숭배사상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며 음양의 관점에서 길일(吉日) 중의 길일, 즉 大吉[대낄]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을 제외하고 그 많던 시절은 모두 사라졌다. 중양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사라진 자라에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져 1년의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다. 근대 접어들어 대표적인 시절행사는 단연코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연말 축제이자 제사 기능을 담당했던 납일(臘日)을 그대로 대신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 가고 있는 시절이 있다. 동지가 그렇다.

1년의 시작은 언제일까? 1주일의 시작은? 물론 모르는 사람은 없다. 1년의 시작은 새해 1월 1일이다. 한 주의 시작은 월요일이다. 그러나 그 시작점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를 모른다. 아니 이 시작점이 그 어떠한 천체의 움직임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냥 우리가 그렇게 “1년의 시작을 정해 놓고, 이날을 1월 1일”이라고 하자고 약속했을 뿐이다. 1년의 시작점이 약속이듯 한 달의 시작도 “그렇게 하자”고 세계 달력에 약속해 두었다.

애초 1년의 시작점을 옛사람들은 동지점에서 찾았다. 간단히 해시계 막대기[규표, 노몬]의 그림자가 가장 길 때를 찾아 다시 그 그림자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의 지점에서 한 해의 시작을 알렸다. 바로 동지점이다.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 동지점을 찾고 다음 번 동지점까지 365.5일이었음을 알아냈다. 이것이 시간을 나눈 24절기이며 곧 동북아시아에서 만들어낸 태양력이다. 이 점에서 동지가 역원이 되었던 것은 지금의 새해 첫날보다 훨씬 과학적인 발상이다.

새해 달력은 동지에 맞춰 반포되었다. 이 동지력은 선물로 대단히 유행했다. 요샛말로 귀티 난 선물용이었다. 동지죽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었다. 동지의 의례는 그 어떠한 시절 행사 중에서도 성대했다. 요즘 그 시절이 사라지고 있다. 아쉽지만 한 시절의 퇴색에 이어 새로운 시간의 탄생과 정착에 대한 기대가 크다.

봄의 아름다운 시절 행사인 삼짇날에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 먹고 마시며 봄의 경치를 즐기는 풍속이 있었던 것과 견주어, 국화주 들고 산을 오르는 등고(登高) 풍속이 성행했던 9월 9일 중양절은 또한 가장 아름다운 가을 풍속의 하나였다.

이제 음력 9월 9일 사라진 시절, 중양절을 기다리면서 가까운 무등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되새겨보자.

▲ 서금석(한국학호남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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