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자제해야 했던 겨울방학을 지나오며 제주도로 떠났던 지난여름방학이 더욱 그리워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답답한 일상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대리 만족의 시간이, 제주도 한 달 살이를 꿈꾸는 누군가에게는 앞으로의 여행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지난여름의 추억을 꺼내봤다.

입 벌려, 한라산 들어간다!

게스트하우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

혼자 있고 싶다. 제주로 떠나길 결심한 이유다. 그동안 바쁘게 달려온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한 달만 제대로 쉬자’는 생각에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떠났다. 한 달 동안 묵을 곳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스텝 일을 하며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또래 스텝들과 생활하니 혼자 지내는 것보다 안전해 보였다. 캐리어 하나에 짐을 챙기고 조촐하게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짠 내 섞인 바닷바람이 나를 반겼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게스트들을 위한 파티가 한창이었다. 어두운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숙소를 안내받고 짐을 풀었다. ‘술 좋아해요?’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스텝 언니 한 명이 대뜸 물었다. 그 언니는 1년 동안 이곳에서 지낸 최고참 스텝이었다. ‘좋아하는 편이다’라는 대답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스텝들이 바뀔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이번 스텝들은 특히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술을 좋아하니 다행이라는 설명이었다. 휴식과 여유를 상상했는데 그와 다른 분위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 밖의 일들이 앞으로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밤, 동틀 때까지 스텝들과 술을 마셨다. 다들 술을 정말 잘 마셨다. 술은 ‘한라산’이었다.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을 마셔야 한다’, ‘한라산이 숙취가 없다’는 등 칭찬이 이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새 술을 마시고 새벽 6시가 가까워져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한 시간쯤 눈을 붙였을까. 첫 근무가 시작됐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인수인계를 받았다. 청소를 하려고 허리를 숙일 때면 전날 먹은 술과 안주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한라산도 숙취는 있었다.

가위바위보로 설거지 할 사람 정하기

근무자는 객실 예약 관리, 객실 청소, 입실 및 퇴실 안내, 파티 주최, 마감 및 정산 등 하루 동안 게스트하우스의 전체 업무를 도맡는다. 근무는 일주일에 하루하고도 다음날 오전까지로 나머지 시간은 완전히 자유다. 남은 시간에는 들고 온 책을 읽고 노트북으로 계절 학기를 들어야지. 그동안 미뤄놨던 영화도 보고, 블로그에 글도 다시 올려야지. 나름의 계획을 세우며 쉬는 날을 기다렸다.

마시는 한라산 말고 ‘진짜 한라산’으로

산책 나온 복장으로 한라산 정상에 오른 날

혼자 있을 수 있을까? 매일같이 스텝들과 술을 마시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어김없이 밤새 술을 마시고 숙소에 돌아온 날 중 하루였다. 아침 7시, 한라산 등반이 시작됐다. 전날 술을 마시며 ‘한라산 등반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던 게 시작이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제주살이 선배들의 노련함이 빛을 발했다.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준비물은 무엇인지, 누가 같이 갈 건지 순식간에 정해졌다. ‘진짜 간다고?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았다. 말하면 이뤄지는 신비로운 곳, 제주도였다.

캔버스, 크로스백, 운동복 차림에 김밥 한 줄, 초코바 두 개, 얼음물 두 통씩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책 나온 복장으로 가파른 산을 오르니 가히 이목이 집중될만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들숨에는 한라산의 맑은 공기가, 날숨에는 전날 마신 한라산의 알코올 향기가 가득했다. 서로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웃으며 산을 오르기도 잠시, 점차 험해지는 길에 말수가 줄어들었다. ‘정상까지 갈 수 있을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아프고 발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토닥이며 나아간 끝에 결국 해발 1950m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 제주 해변에서

혼자인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스텝들과의 여행은 일상이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 지칠 법도 한데 다음날이면 꼭 여행을 떠났다. 장소는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점심을 먹으며 누군가 ‘어디 가고 싶다’고 하면 그곳이 그날의 여행지였다. 날이 좋으면 오름에 올라가고, 더운 날이면 바로 앞에 있는 해수욕장에, 비가 오면 숲을 찾아가거나 폭포를 보러 떠났다. 하늘이 맑은 날이면 회와 맥주를 챙겨들고 별을 보러 떠났다. 난생처음 배낚시와 서핑도 했다. 유명한 여행지부터 숨어있는 명소까지,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계획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일상이었지만 불안함은 없었다. 오히려 편안했다.

떠나요 제주도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나이도, 성별도, 사는 곳도 모두 다르지만 여행객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게스트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제주도에 오게 된 이유부터 살아온 인생 이야기까지, 오랫동안 만나온 친구인 마냥 솔직한 이야기가 오갔다.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깊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제주도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도의 바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의 벽도 쉽게 허물었다.

여름방학이 다 끝나갈 때쯤 제주도를 떠났다. 애초에 정해둔 한 달보다 이주가량 더 머물렀다. 들고 갔던 책은 절반도 읽지 못했고 신청한 계절학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핸드폰이 고장 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핸드폰도 없이 지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머문 시간에 후회는 없었다.

‘제주살이는 어땠어?’ 육지에 돌아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대답은 항상 같았다. ‘사람을 얻었어’였다. 혼자 있고 싶어 떠난 여행에서 사람을 얻어 돌아왔다. 제주도에서 만든 인연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시절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혼자 즐기는 휴식과 여유가 아니었던 것 같다. ‘목적 없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취재를 위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일상에 지쳐있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싫어서, 사람이 싫어서 떠난 제주도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으로 인해 치유됐다. 다가오는 새로운 계절을 기대하며 스물셋의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제주 밤하늘을 수놓는 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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