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5.1.1. 금호각(중앙도서관)의 조감도

대학의 수준과 미래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대학의 도서관에 가보는 것이다. 도서관 장서 보유량이 어느 정도인지, 지식을 갈망하는 학생들의 에너지가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 그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라는 것이다.

▲ 1955.2.6.금호각(중앙도서관) 기공식 지진제

2020년 5월, 전남대 캠퍼스는 연말 완공 예정인 디지털도서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 대학은 ‘홍도’ 라 불리는 도서관 본관, ‘백도’로 불리는 도서관 별관, 지금 공사 중인 디지털도서관까지 3개의 도서관이 있는걸 보니, 꽤 괜찮은 대학인 것은 분명하다.

개교 초창기인 1955년 말, 용봉동 캠퍼스에는 금호각(중앙도서관, 현재의 사회과학대학 자리에 있었던 건물), 문리대 문학부(현재의 인문대 1호관), 법과대(도서관 본관 옆에 위치했던 벽돌건물: 박물관, 출판부로 사용되다가 디지털도서관 건축으로 철거), 공과대(현재의 학군단) 건물이 있었다.

용봉캠퍼스로의 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으니 학교에서 가장 필요한 건물을 먼저 지었을 것이다. 누구의 결정이었는지 모르지만 교사 신축보다 학문 탐구를 위해 가장 필요한 도서관 마련에 공을 들인 것이다.

▲ 1958년 금호각

우리대학 최초의 중앙도서관은 1953년 9월에 의과대학 구관 2층에 자리 잡았다. 장서 4,000여 권으로 개관한 중앙도서관은 추후 용봉동 교지가 확보된 후 1955년 11월에 금호각이 완공되자 용봉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현재의 사회과학대학 위치에 자리 잡은 금호각은 광주여객의 금호(錦湖) 박인천(朴仁天) 사장이 사재를 희사하여 지었으며, 그의 아호를 빌어 금호각(錦湖閣)이라 명명했다. 당시 금호각의 현판은 우리나라 제일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금호각은 2층 벽돌 건물에 건평은 331에 건평은 331평, 기와지붕이 없는 슬라브식 건물이다. 지붕이 없는 슬라브식 건물을 처음 본 광주 시민들이 금호각 앞에서 앞다투어 기념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1955년 당시에는 전남대 캠퍼스내의 금호각 앞 광장이 핫플레이스였던 것이다.

무등산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높은 언덕 위, 용봉동 캠퍼스의 가장 뷰가 좋은 장소, 그곳에 금호각이 자리 잡은 것이다.

▲ 1971년 용주마을과 금호각

 

▲ 1960년 금호각, 용주마을, 문학부, 대학본부

금호각의 주요 기능은 중앙도서관이었지만 박물관, 대학본부, 대학원 행정실, 교수연구실이 곁방살이를 했다. 1973년 중앙도서관 건물(현재의 도서관 별관)이 준공되면서 대학원 전용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경영대학원, 교육대학원, 행정대학원 등의 특수대학원도 금호각 건물에 입주하게 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금호각은 부실호각은 부실공사와 노후화로 보수공사가 자주 진행되었다. 도서관으로 사용하다보니 장서량이 계속 증가하였고, 결국 도서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철근콘크리트 보가 붕괴되어 건물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 것이다.

▲ 사회과학대학 앞 금호각 터를 알리는 표지석

박하욱 총장(재임기간 1965.5. ~1968.5.)은 금호각의 하중을 지탱하는 보가 붕괴되어 쇠파이프로 지탱하는 상황을 문교부(현 교육부)에 보고하며 수리비용을 요청하였다. 문교부에 요청한 도서관 수리비용(3,000만원)은 유기춘 총장(재임기간 1969.5.~1974.9.) 때 배정되었다.

유기춘 총장은 금호각을 수리해도 건물을 사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추후 예산을 확보하여 도서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하였다. 1972년 4층 규모의 신축도서관(현재의 도서관 별관)이 완공되자 금호각은 대학원 전용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1년 4월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인문사회과학관(현재의 사회과학대학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현재 사회과학대학 건물이 들어 서 있는 당시의 금호각 자리에는 금호각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96년 4월에 금호각 설립으로 후학 양성에 힘을 써 준 금호 박인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것이다.

<참고문헌>
전남대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전남대학교 60년사, 전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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