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시대에 오히려 ‘나’와 더 잘 대면하게 되는 것 같다.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화면에 담긴 내 모습을 볼 때면 낯선 타인과 마주하는 듯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나’와 마주할 틈도 없이 살아 왔거나,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나’를 방치한 탓이다. 이번 학기 학생들에게 자아성찰을 위한 글쓰기를 진행하면서 지금 나에게도 온전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글쓰기에 앞서 이성과 감성을 균형 있게 해 줄 수 있는 미술 작품 속 여러 ‘자화상’들을 공유하였다. 자화상은 그림마다 정서를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다. 화가에게 자화상은 일종의일기 혹은 자아성찰 에세이와 같다.자신의 자화상을 반복적으로 그리는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다른 감정의 내면을 응시하는 작업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색과 빛에 담긴 표정과 눈빛으로 화가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내면을 발견한다.

고흐는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40여 점 되는 고흐의 자화상에서 우리는 화가의 내면을 마주하며 그 순간의 그와 교감한다. 자화상을 보는 일은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삶이 투영된 세계를 경험하는 행위다. 자화상은 화가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중국의 어느 화가는 늘 보는 거울이지만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거울 앞에 서면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특징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각도를 찾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거울 안에 서 있는 자신의 낯선 모습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셀카를 찍기 위해 우리가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나 표정을 지어보이듯이 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자화상 ‘윤두서’부터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 그리고 고흐, 나해석, 뒤러, 루벤스, 쉴레 등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자화상을 만나면서 그들의 삶의 궤적과 내면세계를 읽는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언뜻 보면 강렬한 눈빛과 눈썹, 호랑이 상을 떠올리게 하면서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차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조선시대 치열한 당쟁 속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을 때라 한다. 의식적으로 당당한 인상을 표현하려 했으나 강인한 인상 뒤로 쓸쓸함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약 100여점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렘브란트의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그의 고통스러운 황혼기를 담은 <웃는 자화상>이다. 보통 이 그림을 설명할 때, “몸도 마음도 푸석푸석해져서 손을 갖다 대면 부스러기처럼 바스라질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실제 그의 자화상을 보면 구부정한 등, 총기 잃은 눈, 주름 많은 얼굴, 거무튀튀한 눈가의 묘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660년대 이후 그는 말년을 엄청난 빚에 시달리다가 죽는 날까지 파산자로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1663년 흑사병으로 부인과 아들마저 잃고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 어렵게 그림을 그리다가 1669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막연하고 철학적인 물음에서 시작되는 자화상이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했다면, 자기성찰 글쓰기 역시 같은 이유와 맥락에서 시작되는 행위다. 그림이 ‘색’을 통해, 글이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는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아를 잘 이해하는 과정은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소통’을 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이말은 자화상이 자기 내면만이 아닌 타인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비춰진 우리의 모습이 바로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취향에 맞춰 바꾸고, 보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나’ 또한 타인을 향한 나의 ‘자화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이송희(시인, 국문과 문학박사, 제20회 고산문학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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